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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주일 낮 설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 이찬영 201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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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 에베소서 4:1~6. 벧전 1:13-22.

  복음을 위하여 일군이 된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에베소 교인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사도의 목회 중보기도의 내용도 참 감동적입니다. “성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께서 내재하시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체적으로 깨달아 알아 영적 충만을 기도하고 모든 영광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릴 것을 중보하였던 것입니다. 사업이 자녀가 건강이 물질이 풍성해지는 이런 중보기도도 좋지만 영적인 삶에 비중을 두었던 것입니다.” 중보기도에 이어서 바울사도는 특별히 에베소 교인에게 몇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의 말씀은 시대를 넘어 당연히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첫째 권고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살던 때에는 에베소서 4:17의 말씀처럼 허망한 길을 행했었고, 감각이 없는 자가 되어 우리 스스로를 방탕하였으며 모든 더러운 것들을 욕심으로 행하였고, 썩어져 가는 구습을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그와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을 아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좌표를 바로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을 향한 진로를 바르게 정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모르면 우리 인생의 좌표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항해를 하게 됩니다. 고생만 하게 되지 인생의 목적지 항구에 도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항구에 도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시 107: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릭 워렌 목사님은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 탁월한 삶을 기대하시고 계시는데 그러므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열매들이 있게 하옵소서. 베드로전서 1:13∼22을 보면 베드로사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름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신, 부르심을 입었으니 부르사, 불러내어” 등의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사탄의 미혹과 세상의 유혹에 의하여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덕분으로 사는 것 같이 만들고, 우상의 덕분으로 사는 것 같이 만들고,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사는 것 같게 인식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은혜를 바라면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방주를 지음에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홍수 심판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할 줄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장차 임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믿음으로 미리 예측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가 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어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은혜를 놓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방의 땅에서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 믿음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리브가는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중매에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믿음으로 따라와서 이삭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기에 가능했고, 신앙의 가문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은혜를 가져다 주십니다. 포도주가 부족한 잔치집에 주님은 물로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는 기적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병들어 고통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빈 그물로 허탈해 하는 어부에게 주님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위로와 칭찬, 사랑의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주님이 가져다 주실 은혜를 믿음으로 기다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벧전 1:15)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명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름이 아니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에게 나올 수 없고, 우리들 자신도 하나님께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나 칼빈 같은 분들은 “불가항력적인 은혜, 거절할 수 없는 은혜”라는 강조를 하였던 것입니다. 원래 이 “거룩하다”는 말은 우리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입니다. 계시록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 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이처럼 “거룩”이라는 말이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인데, 오늘의 본문에는 우리를 보고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 길은 어떤 길을 통해서 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거룩하게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둘째 권고는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과 온유는 예수님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혹자는 겸손이란 낮출수록 커지는 삶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겸손을 뿌리로 하고 피어난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는 덕목인 것입니다. 내가 겸손해야 할 이유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의 피흘림의 공로가 있어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세째도 겸손이라 했던 것입니다. 온유란 단순히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정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지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엄청난 부와 명예와 지식이 있어도 잘 절제되고 통제가 될 때 온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이 땅에서 온유한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입니다. 제자가 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또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멸망치 않기를 오래 참으신 것처럼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 서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야 하고, 예수님의 온유를 닮아야 하고, 예수님의 오래 참음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이 겸손하신 것처럼 주님이 온유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과 같이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성품들이 나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게 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의 세 번째 권고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보는 것은 하나 되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해 놓으셨으니 나누지 말고 힘써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 그렇고, 교회가 그렇고 내게 속해 있는 모든 조직이 그렇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깨어짐과 나누어 짐, 분열과 찢어짐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의 분열사를 공부해 보면 확실해 집니다. 바울사도는 하나가 되어야할 이유로 최소한 7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다. 성령이 하나다.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다.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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