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주일 낮 예배 | 이찬영 | 2013-0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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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막 2:1-12) 2013. 1. 13. 주일낮예배 오늘 본문은 ‘며칠이 지난 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그 집은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사람들의 ‘목마름’을 알아차리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마가는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복잡하고 정교한 신학적 언어가 아니라, 단순하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잘 전달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각양각색의 병든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인생들의 모든 아픔을 담당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가슴에는 어떤 따뜻함이 배어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일단의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데려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마가는 그 까닭을 ‘무리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평범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무리’라고 번역되는 단어 ‘오클로스(oklos)'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군중, 즉 힘없는 민초를 일컫는 말입니다. 밟으면 밟히고, 뺏으면 빼앗기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이란 시에서 표현한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이 지나면 또 다시 몸을 일으키는” 민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선하지도 않고, 늘 악하지도 않습니다. 삶의 상황에 따라 그들의 처신은 달라집니다. 그들은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들에게 가장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통념에 입각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수용하기도 하고, 자기들의 기대에 맞지 않을 때는 배척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자에게 ‘무리’가 장벽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중풍병자에 대한 무관심과 당시에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죄인임을 입증해준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과 만나려면 무리들의 무관심과 통념이 해체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일상화된 무관심과 통념을 스스로 해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무리로 인해 길이 막히자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어지간하면 포기할 법도 하건만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걷어내고 중풍병 환자를 예수 앞에 침상채 달아 내렸습니다. 놀라운 열정입니다. 엘살바도르의 순교자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사방이 가로막혀 있을 때 위를 바라보는 것이 초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중풍병 환자와 그를 데려온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또 그들의 이름에 대한 소개도 없지만, 예수와 중풍병 환자를 기어코 대면시키겠다는 그들의 ‘열정’은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은 ‘무리’라는 장벽, 곧 사회적 통념이라는 장벽에 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남다름은 무엇입니까? 절박함입니다. 절박함이 있었기에 그들은 길 없는 곳에 길을 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모두 그런 열정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실천은 대개는 장벽 앞에서 힘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지금까지 한 일로 자족해 버립니다. 하지만 오늘 ‘중풍병 환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무리와 그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중풍병 환자를 죄인이라는 사회적 통념의 틀 속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과 외로움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적 비난과 그 어떤 장애에도 그의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해 주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마가는 아주 놀라운 말을 들려줍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5) 중풍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침상을 메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는 여기서 ‘중보기도와 중보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롯을 구출하시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을 귀신에게서 해방시키시고,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절박한 마음입니다. 내 문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품고 애타는 마음입니다.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네사람의 믿음 곧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긍정과 협동의 믿음을 소유한 분들입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1절 “소문이 들린지라” 예수님에 대해 좋은 소문도 있지만, 나쁜 소문도 있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귀신이 쫒김을 당하고, 죽은자가 살아난다는....반면에 예수는 나사렛 이단이요, 율법을 폐하는 자요, 신성모독을 하는 자요,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소문에 대해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갖고 네사람이 협동을 하였습니다. 추측컨대 네사람이 침상을 메고 함께 온 것으로 보아 제법 먼 거리에서 찾아 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걸음이 빠른 사람 느린 사람, 성격이 급한 사람, 느긋한 사람, 하지만 네 사람은 협력하였고, 마음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전폭적 신뢰의 믿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행동으로 실천함에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먼 거리를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무리들’(사람들이) 문제 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계시다는 대문 밖까지 왔다가 들어갈 수 없으니까 포기할 위험이 많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대문까지 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는 데, 양보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데, 어쩌겠는가?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나뵈면 중풍병일지라도 반드시 낫는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신다. 예수님안에는 불가능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누군가 한 사람이 외쳤을 것입니다. "지붕으로 올라가자, 지붕을 뚫자, 내가 책임지겠다." 선을 행하려 함에 있어, 병자를 고치려는 마음, 생명을 구하려는 마음, 이해득실을 떠나 모든 책임을 감당하려는 사람들의 그 열정적인 믿음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중풍병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상을 가지고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중풍병 자가 스스로 일어난 것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은 그가 ‘일으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마비되었던 그의 몸과 마음이 풀렸고, 힘이없던 두 다리에 힘이 채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의 아침에 울려 퍼졌던 하나님의 말씀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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