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주일 낮 예배 | 이찬영 | 2013-02-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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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과 핍박(마5:10-13.막10:28-30.) 2013. 2. 17. 주일낮 설교.
또한 신앙생활에는 대부분 환란과 핍박이 동반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죽을 때까지 괴롭게 하고 옥죄여 힘들게 합니다. 자유를 박탈하고 온갖 불이익을 가져다 주고 목숨까지 빼앗고자 합니다. 이것을 핍박. 박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원얻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가능합니다. 내 공로나 의지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진리를 준수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을 마귀와 세상은 핍박을 합니다. 이런 것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만만치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적 관점에서 항상 손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핍박을 받아본 적 있습니까?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라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마24:17 “사람들이 너희를 내어주리니 너희가 많은 시험에 빠져서...” 요한복음15:19-20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부름을 받아 내 자녀가 된 까닭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나를 핌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 행14:2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핍박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핍박, 환난은 필연적입니다. 신앙생활하면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고, 형편과 처지가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시험에 빠지기 쉽상입니다. 오히려 죄악된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니 고난과 핍박을 감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온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전능자이신데 신자들에게 핍박과 환란을 허용하시는가? 데살로니가 3:3을 보니 “이것은 그가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여러분을 격려하여 누구든지 핍박 환란에 있는 자들을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런 환란과 핍박 가운데에서 더 든든히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큰 나무가 되려면 모진 비바람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을 방문합니다. 토기장이는 자신이 만든 토기가 마음에 안 들면 주저함 없이 깨버립니다. 토기장이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을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주권이 월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차없이 깨어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먼저 인격을 존중해서 대화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돌이키시기를 원하시고 원래 창조하신 뜻대로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시거나 주도권을 행사하시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을 더 존중하십니다. 그러므로 환란을 통해 (환난을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더 깊게 내리도록 우리를 촉구하십니다. 곡식이 알곡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씨가 뿌려지고 자라납니다. 비바람, 병충해을 비롯한 온갖 시련과 역경을 감내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추수하여 껍질을 벗깁니다. 백미라는 것은 흰쌀이라는 뜻도 있지만 백번 껍질을 벗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의 과정을 통해 알곡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해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셔서 골고다 언덕에까지 오르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겪는 과정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환란과 핍박은 큰 유익을 가져다 주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에 보면 “현명한 이들은 단련되고 깨달을 것이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롬8:17-18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받아야 하느니라 현재의 고난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구하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역사하셔서 환란과 핍박을 막아주지는 않습니다. 이 핍박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마귀가 주는 환란과 핍박은 극심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환난을 만나면 인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성도를 결코 방관하시지는 않습니다. 욥의 고난과 역경을 다 감찰하시듯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핍박을 이겨낼 때 이 땅에서 잘되는 복을 주십니다. 하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런 환난과 핍박을 감내하시길 바랍니다. (막10:30.) 돌이 적재 적소에 사용되어지려면 정을 맞아 다듬어 져야 합니다. 나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듬어 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참된 신자는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세워집니다. 환난과 핍박은 ‘연장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 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핍박이 다양한 모습으로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기자가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믿음의 지조와 정조를 지킨 이들, 심한 조롱, 옥에 갇힘, 집을 떠나 유리방황하는 것...등, 우리의 많은 신앙의 선진들은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기꺼이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 승리의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신앙생활이 그렇게 만만한게 아닙니다. 핍박은 신앙생활에 항상 뒤따라옵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이 결코 하나님의 저주나 진노의 여정이 아닙니다. 앞으로 신아의 열심을 낼수록 핍박은 견디기 힘듭니다. 핍박의 강도도 강해집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겁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가 주행을 할때 주행하다 손을 창문 밖으로 내밀면 속도에 따라 바람의 세기를 느낍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강해면 강하게 느낄수록 악령의 역사도 비례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핍박을 덜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적당히 해야겠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안됩니다. 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 개종하여 기독교를 믿으려는 움직임이 많았습니다. 앙리 14세가 개신교를 믿었습니다. 칼빈의 제자 베자가 앙리 14세에게 신앙생활을 더 열심을 낼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 때문에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은혜의 깊은 곳으로 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륜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뜰에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 우리의 몸과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성소안으로 또 지성소로 나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깊은 곳으로 갈수록 핍박이 많아진다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합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7:52-60절 스데반집사의 설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의 설교에 찔림을 받은 종교인들은 돌을 들어 스데반을 순교시킵니다.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스데반은 기도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쓰러져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마 5:46 “그러나 너희가 들었으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핍박자에 대한 태도입니다. 원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러므로 핍박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변절 되지 말고, 오히려 핍박이 올 때 감사함으로 핍박하는 세력을 위해 기도하는 적극적인 능동적인 신앙생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핍박이 나쁜 것 만은 아닙니다. 핍박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행8:1절에 보면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시합니다. 이 사건 이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핍박으로 흩어집니다. 이후로 교회는 각처로 흩어져서 부흥됩니다. 행19장에 보면 베니게, 구브로,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전하므로 교회가 세워지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견합니다. 환란과 핍박이 있을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의지하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어려울 때 교회는 더욱 부흥합니다. 별세신학을 강조하신 이중표목사님은 암병에 대해 자기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암병 때문에 의지하는 하나님을 더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런 불청객을 친구로 동반자로 여기며 살아간다고 간증했습니다. 여러분! 힘들고 지칠 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이런 핍박을 받을 때 신앙의 성숙과 축복이 반드시 임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 핍박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 풍성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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