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주일 낮 예배 | 이찬영 | 2013-05-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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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사람들. 막 11:1-10. 2013. 3. 24. 종려주일설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수난을 당하게 될 것을 여러번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절에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군중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며 환호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입성하시던 그 주일, 곧 종려주일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린 것이 있었습니다. 1)예수님께 나귀새끼를 드린 무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2)예수님께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다 깔아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3)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환호하는 군중이 있었습니다. 먼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과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에 이의 없이 나귀를 드린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11절 말씀을 중심으로 이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일은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곳은 ‘감람산 벳바게’입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예루살렘에서 1.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발 814m 높이의 산입니다. 이 산의 서편 기슭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고, 남동쪽 기슭에 벳바게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벳바게’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때는 곧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고 있었을 때입니다. 당시의 순례객들은 특별한 교통수단 없이 걸어서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일행도 지금까지는 죽 걸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앞에 두고 2절과 3절에 예수님께서 특별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자 계획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바로 구약의 예언 성취인 것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스가랴9:9) 2절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절에 이 나귀 새끼는 아무도 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나귀를 기른 주인과 예수님 사이에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주인이 되심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순히 안면이 있는 정도라면 3절에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소유주이심을 의미합니다. 틀림없이 나귀를 기른 사람은 예수님이 “주”이심을 믿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나귀와 나귀새끼를 예수님께 보내 구약의 에언을 성취케 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시며 나의 삶에 주인 되심을 믿는다면 “주가 쓰시겠다.” 이 말씀 앞에 모든 것을 주저 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다음은 예수님께 자신의 겉옷을 드린 사람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의복은 중요합니다. 생활하는 데 날씨와 온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의복은 꼭 필요합니다. 또한 사회 생활을 하는 데 복장은 그 사람의 신분과 생활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옷이 날개다.”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밤과 낮의 기온차이가 극심한 유대지역에서 겉옷의 용도는 다양했습니다. 이 귀중한 겉옷을 벗어서 어린나귀 등에 올려 안장을 대신한 제자들의 마음씀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길에다 겉옷을 벗어서 깔아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조금은 광적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의 아침에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열광을 했습니다. 실상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할 그 죄의 형벌을 자신의 피로 씻어 주시기 위해 그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며 입성하시는 데....... 주님께 자신의 겉옷을 길에다 깔아 드렸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으시기에 넉넉하십니다. 삼백데나리온 이상의 가치를 가진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던 베다니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롬12:1)아멘!!!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배고픈 민중들 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통치와 헤롯왕가의 압제속에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던 민중들은 기성 종교인들과 판이하게 달랐던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기사와 표적, 그 능력 베푸심에 대하여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민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외치고 싶어 했던 말입니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러나 일주일도 안되서 환호하던 민중들은 사악한 종교인들 편에 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무기력하게 침묵으로 일관한 모습에서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기대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들의 모든 약함을 뛰어넘어 찬란한 영광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뭏튼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양탄자 대신 깔아드린 그들의 겉옷을 지나고, 환호하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저물어 가니 열두제자들을 데리시고 베다니로 나가셨습니다. 처음 종려주일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드리며, 따르며, 환호하며, 동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나귀와 나귀새끼를 선뜻 내어 드릴 수 있는 첫 종려주일의 나귀 주인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벗어 나귀 안장을 대신한 제자들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편 사람들처럼 “자신의 마음과 겉옷을 벗어 펼쳐드릴 수 있기를 바립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찬송하되, 내 중심으로 이해하고, 판단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바른 섬김과 충성을 드리는 종려 주일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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