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주일 낮 예배 | 이찬영 | 2013-07-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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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나오라! (요한복음 11:38-44) 2013. 6. 23. 주일낮 예배.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사도요한은 정규학교에서 학업과 학문을 수업한 적이 없는 평범한 갈릴리호수의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가 소개하는 인카네이션 즉 도성인신의 교리는 고대 최고의 지성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훨씬 능가하는 오묘한 진리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선생이신 침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는 말을 듣고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 하룻밤의 경험을 안드레는 형인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요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의 형제와 안드레의 형제는 배와 그물, 부모와 처자를 버려두고 예수님의 최초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 되심’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요한복음에 수록된 7대 표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됩니다. 왕의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십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5천명이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남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가셨습니다. 또 태어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봉독해 드린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십니다. 이러한 표적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표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니고데모를 만나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복락에 대해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여인의 삶을 바꾸어 놓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요한사도는 죄 가운데 비참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 예수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티릭한 인간을 화해시킬 수 있는 중보자이시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여러 각도에서 증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신 것을 의심 없이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적과 표적이 있으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적과 표적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일반 종교인들의 신앙생활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맡겨야 하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시는 분들은 오늘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또 예수님이 구원자이고 내 삶을 책임지는 분이심을 믿고 확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죽음에서 부활을 그리고 양생의 소망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할렐루야!!! 사도요한은 11:2절에서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삼남매를 각별히 생각하셨던 것을 찾아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들을 보면 그러한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1절에서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카톡의 글 소개) 이런 관계에 있었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오라비가 죽어가오니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오십니다. 21절에 마르다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23절에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장차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미래적인 것을 애기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결교회는 중생과 성화를 강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신유와 재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감리교회와 차별성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난치병을 고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성결교회의 교리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인데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의 육신이 건강하게 치유 받는 것을 신유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유는 우리의 심령과 삶 전반에도 필요합니다. 신유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이 정결케 될 것의 예표로 주님께서는 신유의 사건을 보여주십니다.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신유의 은혜로 다시 살아납니다. 무덤에 장사되었던 나사로가 다시 사는 모습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소망가운데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두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먼저 무덤은 어떤 곳입니까? 무덤은 인간의 영과 분리된 소위 죽은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입니다. 더 이상의 의미도 그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곳입니다. 긍정적으로 삶이 끝나고 휴식과 마침이 있는 곳으로 여길 수 있으나 무덤은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절망과 포기를 더 강하게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무덤은 활기나 기쁨 따위가 소진되는 곳이나 그런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용어로 쓰이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편에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마감되었다고 체념하여 돌문으로 무덤을 정리하였지만 하나님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의심과 불신의 돌문을 옮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으로 정리해 버린 나의 삶을...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채워 포기로 무덤을 만들어 버린 내마음을 새롭게 엮어보라고 하십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면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나오라는 것은 게으름과 안일의 자리, 불신과 의심의 자리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올해 104살이신 방지일목사님은 “하나님! 내 몸이 낡아서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에 나를 불러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재능을 사장시키지 않는 충성스런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생명, 부활,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현재적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막힌 돌을 옮기고 무덤에서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하늘나라에 많은 상급을 쌓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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