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주일 낮 예배 | 이찬영 | 2013-08-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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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 롬8:1-4.
2013. 8. 11. 주일낮 설교.
이번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8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동안 우리민족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세계에 한류를 흐름이 대단합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나라 신앙인은 30만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천만 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인구 성장에 비하면 엄청난 부흥의 역사입니다. 1949년 인구가 2018만이었는데 지금은 5000만이 넘었습니다. 인구 성장은 약 2배쯤 성장했는데 기독교의 성장은 33배의 성장입니다. 1955년 4월 태국에 처음으로 최찬영, 김광명 선교사 부부를 파송함을 시작으로 현재 169개국에 선교사 2만 2014명 파송하는 선교 강국이 되었습니다. 경제 규모도 엄청난 성장을 하였습니다. 1953년 13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액(GDP)은 세계 242개 국가 중에서 11,12위를 차지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평균 수명이 42년에는 45세였는데 지금은 77세를 넘었습니다. 대학교도 47년에는 학생 수 2만 학교 24개였는데 344개가 되었습니다. 전화 가입자도 46년에는 3만 6천명이던 것이 지금은 개인이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동차도 48년에는 1만 5천대이었던 것이 지금은 1천 5백만대를 넘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해방은 되었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일본 무역 의존도가 22.3%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수출로 아무리 흑자가 내도 대일 무역적자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품, 소재, 기계류 등 기본자재의 대일 의존도가 높습니다. 요즈음 한류가 일본에 불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 문화의존도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제 잔재가 우리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본 만화가 우리 청소년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과 단체들의 행태는 우리의 의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합니다. 갖는 수모를 겪으셨던 정신대 위안부들의 문제에 파렴치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였던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몰상식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에 대한 국민적 정서가 좋은 것은 아닌듯 합니다.(미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이 아마존에서 당한 일) 사람은 누구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구속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요즈음 케이블 T.V에서 방영되는 ‘스파르타쿠스’ 역시 로마시대에 노예, 또는 검투사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싸움이 주제입니다. 미국의 헨리는 "내게 자유를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요!"라고 외쳤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주장한 4대 자유 즉,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굶주림으로부터 해방 받을 자유, 어디서나 공포로부터 보장 받을 자유는 큰 공감을 불러왔습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가 주목해야할 참 자유는 무엇일까요?
1. 진정한 자유는 정죄로부터 자유입니다(1)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진정한 자유는 정죄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정죄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확정 짓는 것을 말합니다. 단어의 뜻에는'세금' '부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죄의 삯, 죄의 부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채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자유롭지 못합니까? 경험해 본 분들은 말을 안 해도 충분히 공감을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병은사장님’쎄서 전화를 하셔서 교회 상황이 어떠시냐고 물어서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분의 위로가 격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빚진 사람의 마음은 고단합니다. 밥맛이 없어지고, 협박당하고, 도망하고 싶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경련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자살하기도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정죄를 당하면 그렇습니다. 죄의 무게는 엄청납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정죄합니다. 가족이 나를 정죄합니다. 가장 친한 남편이, 아내가, 부모가 나를 정죄합니다.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정죄합니다. 기억이 정죄합니다. 과거가 자신을 정죄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 과거를 보라, 너의 추잡한 인생을 보라 네가 예수 믿는다고 위선 떨지 말라.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는 더러운 인간이야. 너의 과거를 폭로하면 너는 얼굴 들고 사람들 앞에 서있을 수 없어. 고상한 채 하지 말고 그저 질퍽하게 살아.” 조롱하고 정죄합니다.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용기를 꺾어 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정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그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다 받아내셨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아시지 않습니까? 공소 시효가 소멸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죄 상태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법적으로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평안히 가라'고 하신 선포와 같이(요8:11) 우리가 어떤 죄를 졌다 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고 기억지도 아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누가 정죄로부터 자유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멘!!!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ter)가 종교개혁을 할 무렵입니다. 자기 서재에서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주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요사이 지은 죄도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루터는 "그렇다."고 시인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바로 살아! 너 이 죄 값을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 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지며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회사에서 너도 예수 믿느냐고 정죄를 합니다. 양심이 너 같은 것이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냐고 정죄합니다. 과거에 지은 죄가 우리를 정죄하며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할렐루야!!!
2. 진정한 자유는 사망에서의 자유입니다(2). 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생명과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로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말씀합니다.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죄의 결과로서 오는 사망의 원리, 사망의 법칙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의 법'에 속박되었고, 사망를 언도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무기력해 집니다. 아무리 지식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일입니다.(히9:27)”건강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권력 있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죽음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폐수종으로 입원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인생들을 가장 억압하고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의학의 발달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 줄 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심리학자 헤르만 파이펄은 심상 투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쉰을 넘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몰두"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 죽음의 공포와 이 죽음의 형벌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해방을 시켜 주었습니까?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복음을 말씀합니다. 율법은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복음은 구원하여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새 번역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중생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감화 감동시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입술로 시인하게 합니다.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바로 사망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해방되어 완전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죽음의 순간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죽음의 순간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고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서 있는 사도 바울의 벗진 간증을 보십시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3. 진정한 자유는 율법의 요구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3절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4)” 진정한 자유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요구를 온전하게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덕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하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으로 다가옵니까? 하지 말라는 것만 있습니까? 하라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선을 행하라” 얼마나 많은 하라는 명령이 있습니까? 율법은 이것들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을 지켜야 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100% 지키지를 못합니다. 우리 보다 훨씬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5)” 7장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9)”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속사람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원함은 있지만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바로 죄도 안 짓고 욕심도 없어지고 갈등도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심령 속에서는 두 법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입니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죄에 종 노릇할 때에는 죄가 죄 인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죄를 깨닫고, 갈등도 하고, 곤고해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아픔도 고통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갈등도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런 갈등은 지속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도 흔들립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하늘의 불을 불러 이방선지자 850명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세벨이란 여자 한 사람이 두려워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우리의 힘으로 율법의 능력으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고 살지만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이런 부담으로부터 어떻게 해방시켜주십니까? 3절 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4)” 하나님은 하시나니에 밑줄을 그으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일을 하셨습니다. 벧전1:19“우리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보내어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셔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이루십니까?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6)” 구원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 성숙도 우리의 신앙적 사명도, 우리의 성화도 우리 하나님께서 해 주시면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패배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시옵소서! 나는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고 주를 더욱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은혜안에 믿음안에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소서...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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