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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주일 낮 예배 이찬영 201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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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니고데모)요한복음3:1-8. 2013. 8. 18.

‘샘명의 샘가’ 필진이신 김필곤목사님께서 좋은 만남은 손수건과 같다고 했습니다. 힘들 때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는 만남..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만남으로 엮어집니다. 그리고 그 만남에 의해 우리의 인생의 질이 좌우됩니다. 어떤 만남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어떤 만남은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무의미한 만남으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삶의 방향을 바꿀 만한 엄청남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특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 삼남매(요11장), 태어나면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9장), 현장에서 잡혀온 간음한 여인(요8장), 베데스다의 38년된 불구자(5장),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요4장), 그리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요3장), 등등..대부분 인생의 여정에서 문제를 지닌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서지고 깨어진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놀라운 삶의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일들이 당시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달라지고, 아름답게 변화되는 기적의 역사는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보통 사람들의 가치 기준과 판단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을 살펴보고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은 오다가다 우연히 생긴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계획되고 신중하게 행동함으로 만든 만남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는 당시 유대종교의 한 분파입니다. 이들은 전통을 중시하고 율법에 철저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엄격한 율법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만났습니다. 쉽지 않은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점점 갈등과 대립이 증폭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날 때마다 충돌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이기 위해 외식과 위선으로 일관 한다고 질타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려고 한다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파에 속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백성들의 삶을 깊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권력이었습니다. 이 종교권력의 핵심은 바로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거의 동등하게 공회를 구성하고 있었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낼 때 몰약과 침향 백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을 염을 한 것이 니고데모의 부와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은 당시 왕족의 장례에서 시신을 갈무리 할 때 사용하는 고가의 재료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건강도 있고,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학식도 많아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존경도 받는다면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입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오늘 소개되는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백성들 중에 정복자’입니다. 이름의 뜻에 걸 맞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에 왔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비밀리에 왔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조직을 배신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칫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라는 그의 지위가 위태롭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에 대해 당당하지 못한 소심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에 찾아온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사정을 고려한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는 예수님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하층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된다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낄 것이고, 그래서 반대가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고려해서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니고데모가 산헤드린 회원으로서 낮에는 너무 바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이 낮에 너무 바빠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도요한이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그 이유를 추측하려고 애를 씁니다. 어쨌든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왔는데, 저는 거기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19:39에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라고 재차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므로 받게될 여러가지 불이익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결코 인사치레로 온 것이 아니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밤이 새도록 토론을 할 수도 있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대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밤에 찾아온 이유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랍비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나 랍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랍비는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 공회에서 인정해서 자격증을 주어야 랍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이가 40이 넘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율법학자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신학박사입니다. 그것도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 될 정도이면,(당시 약6000명의 바리새인 있었습니다.) 그는 흔한 박사가 아니라 대학자입니다. 니고데모야말로 랍비 중의 랍비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나이도 이제 겨우 서른을 갓 넘겼습니다.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목수 일을 해 온 것뿐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은 나이 많은 율법학자가 목수 출신의 새파란 젊은이에게 랍비라고 부르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만남이었습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구도자라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간절히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학자인 니고데모가 추구하는 진리란 인간의 영생과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진리에 대한 구도적 열정은 대단하였습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자신의 지위나 나이, 또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면, 나사렛에서 온 젊은 목수를 랍비라고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가 더 배우고 얻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가진 것들을 주장하지 않고 내려놓음으로써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 많은 율법학자들과 랍비들 중에서 최고의 랍비이신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신 사람이 니고데모 말고 또 누가 있었습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 즉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이라면 율법과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는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랍비의 자격증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그런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래서 나이 많은 율법학자 니고데모는 젊은 청년 예수에게 머리를 숙이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장 23절에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표적은 싸인(sign)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입니다. 즉 표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증거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표적들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이라고 믿었고, 그분과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렇게 밤에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인생에서 이 만남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았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추구하던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실은 니고데모가 추구하던 그 진리 자체였습니다.

서두에서 드린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좋은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습니까? 우리가 많은 좋은 만남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좋은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인생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예수를 만남으로 우리는 영원한 심판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만남들을 추구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 해도 해결될 수 없고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얻었고, 높은 지위와 권력과 재물을 가졌어도,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지 못했으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니고데모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높은 지위와 재물과 명예를 모두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뭔가를 간절히 찾고 가운데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평생 율법을 연구했지만 진리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참된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를 만남으로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환경에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남의 눈을 피해서 밤에 찾아와야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진리와 생명을 찾게 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에수님을 인생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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